에세이 11

밤에야 비로소 생각나는 사람들

나는 원래도 생각이 많은 편인데,밤이 되면 그 생각들이 더 커진다.몸은 피곤한데, 진짜 잠들어야 하는데마음은 온갖 생각이 마구 떠오른다.​그래서 종종 잠을 설치기도 한다.그런데 이상하게도그 시간엔 오래전 인연들이 자주 떠오른다.​사실은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인데,아르바이트를 하며 스쳐 지나갔던 손님들.내가 실수했을 때 괜찮다고 웃어주던 분들.그때는 정신없어서 깊이 생각하지 못했지만,지금 돌아보면 그 따뜻함이 나를 오래도록 안아줬다.​여행을 다닐 때 도움을 주었던 현지인들도 생각난다.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,그들이 내게 건넨 친절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.바쁘게 살 땐 잊고 지냈던 얼굴들이밤이 되면 조용히 떠올라 괜히 반갑다.​어쩌면 그들은 나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.나에겐 또렷한 순간이그들에겐 그냥 ..

가끔은 조금 돌아서 가는 길

스쿠버 다이빙을 하면다이버들끼리는 늘 이렇게 묻는다.“오늘 시야 잘 나와?” “시야 잘 터져?”그 말은 곧, 오늘은 물속이 얼마나 잘 보이냐는 뜻이다.​시야가 잘 나온 날은 바닷속 풍경이 맑고 멀리까지 보인다.물고기도, 지형도, 햇빛도 눈에 다 들어온다.​그런데 시야가 흐린 날은 무섭다.바로 앞도 보이지 않고,불안감과 공포가 물처럼 가슴 안으로 밀려온다.​물속에서는 그렇게 애써 시야를 확보하려고 하면서도,현실에선 그걸 자주 잊고 산다.고개만 들면 보이는 하늘조차 바라보지 않고,손에 든 화면만 들여다보며 하루를 살아간다.​서울에서 바쁘게 지낼 때면하루 종일 아래만 본다.바닥, 핸드폰, 쌓여 있는 일들.내 앞만 보기에도 벅차고 숨이 찬다.​그런데 본가에 내려가면나는 자주 하늘을 본다.정해진 일정도 없고,조급..

안 보는 TV를 그냥 틀어두는 이유

“웅성거림도 온기의 일종이었다.”웹툰 '살아생전'에서 봤던 문장이 있다.​그 말을 처음 봤을 때, 이상하게 마음이 찡했다. 나는 혼자 산 지 오래되었다.집에서 혼자 있는 대부분의 시간은 조용하고 평화롭다.하지만 가끔은 웅성거림이 그리워진다.​집 안이 너무 고요하게 느껴질 때면,그냥 TV를 켜놓는다. 뉴스도, 예능도 상관없다. 그저 사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배경이 필요할 때가 있다. ​사람에 치일 땐 혼자 있고 싶고, 소음에 지칠 땐 고요함이 너무나도 간절한데어떤 날은,그런 웅성거림이 이상하게도 마냥 따뜻하게 느껴진다.​아무도 나에게 말을 거는 건 아니지만 그 말들이 부딪히고 흘러가는 소리 안에 사람의 체온 같은 게 있다. ​혼자 사는 인구가 늘어나고, 혼자 외로이 떠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사회에서..

그럭저럭 괜찮아지는 순간

요즘은 멋진 취미들이 참 많다.골프나 서핑, 멋진 카페 투어 같은 것들.시간을 꽤 근사하게 쓰게 하는 취미들이다.​나도 이것저것 취미가 많은 편이다.그런데 그 많은 취미들 사이에서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, 어떻게 보면 조금 촌스럽다.날씨 좋은 날, 햇볕 드는 곳에 가만히 앉아 있는 일.​장비도 필요 없고, 기록을 낼 필요도 없고, 잘해야 한다는 부담도 없다.그저 따뜻한 자리를 하나 찾아 조용히 앉기만 하면 된다.가끔은 시골 본가에 내려가 마당에 의자 하나 놓고 앉는다.​선선한 바람이 다가오고, 햇볕이 얼굴에 느껴진다.햇볕은 그냥 거기 있을 뿐인데, 어느새 내 마음이 느긋해진다.​햇볕을 쬔다고 해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.엄청난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, 신이 나는 것도 아닌데,이상하게도 그 시간을..

그날, 시계를 본 사람

나는 8살이었다.‘죽음’이라는 단어는 알고 있었지만,그게 어떤 경험인지, 어떤 감정인지, 아직은 와닿지 않던 나이였다.​외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아프셨고 내가 기억하는 그분은 거의 말도 하지 못하던 분이었다.그래서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그날,슬프다기보다는 엄마가 울었기 때문에 나도 같이 울었던 것 같다.눈물은 났지만, 진짜로 ‘그가 떠났다’는 실감은 없었다.​그런데 그날의 이야기 중 하나가 내 삶에 오래도록 남아 있다.임종을 지키던 엄마와 이모들은 외할아버지가 자꾸 시계를 바라보셨다고 말했다.의식이 희미해져가는 그 순간에도, 자꾸만 시계를 보았다고.나는 그 장면을 본 적이 없다.하지만 그 말은 이상하게 내 마음에 아주 깊이 남았다.​그의 마지막 기억 속에서시계는 도대체 어떤 의미였을까.정말 시간이 다 된 걸..

밀려드는 시간, 지워지는 나_드라마 '폭싹 속았수다'를 보고나서

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.신이 세상을 창조했다거나, 어떤 신의 뜻대로 내 삶이 흐른다고 믿지 않는다.하지만 나는 매일 시간을 느낀다.그리고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력함과 경외를 동시에 경험한다.​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.시간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, 우리의 몸을 늙게 하고, 관계를 바꾸고, 기억을 흐리게 만든다.사랑도 상처도 모두 시간에 감긴다.그 신비한 흐름 앞에서,사람들은 종종 신을 찾는다.혹은 시간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.​무당이나 점쟁이, 신점을 보는 사람들.그들은 어쩌면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는더 높은 차원의 시간,그 흐름의 패턴을 감지하는 이들인지도 모른다.사실, 우리가 그들에게 묻는 건 거의 항상시간에 관한 질문이다.​“앞으로 어떻게 될까요?”“이 일이 언제 끝날까요?”“그 사람은 다시..

Ep 05. 촌년의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여행

저는 산 vs 바다 중 고르자면 바다, 도시 vs 자연 중 고르자면 자연입니다. 하지만 제가 유일하게 도시에서 건물을 보고 제가 그렇게 좋아하는 바다를 본 것만큼 행복한 날이 있었습니다. ​ 초등학교 때 인지, 중학교 때인지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미술 책에서 오페라하우스 사진을 보았습니다. 굉장히 신기하게 생긴 건축물이라 강한 인상이 남았습니다. 어릴 때는 그저 막연히 오페라하우스를 실제로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만 몇 번 했었습니다. 그 후로 방송이나 다른 매체에서 오페라하우스를 보면 그나마 아는 외국 건축물에 괜히 반갑기도 했습니다. ​ 그러다 22살,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결정 후 도시를 정할 때 별 조사 없이 그냥 시드니로 정했습니다. 사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헷갈려 하듯이 호주의 수도..

Ep 04. 여행에 4000만원 넘게 쓴 사람이 느끼는 여행의 과대평가

'무슨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청춘, 인생을 낭비하는 사람 처럼 언제부터 여행의 의미가 이렇게나 과대평가 되었을까???' ​ 저는 여행에만 2014년 부터 2023년 지금까지 4000만 원이 넘는 돈을 썼고 (물론 어떤 분들에겐 전혀 큰 돈이 아닐 수도 있지만...) 매년 다니는 국내외 스쿠버 다이빙, 혼자 갑자기 떠난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시작으로 혼자 중남미 여행까지 많은 여행을 다녔습니다. 그만큼 저는 여행을 정말 좋아하고 매년 열심히 다니지만 그래도 위의 생각은 자주 합니다. ​ 제가 한창 여행을 다니던 2014년~2016년? 쯤에는 세계여행, 배낭여행이 '유행' 같았습니다. 뭔가 청춘! = 여행! 으로 공식 처럼 여러 SNS에 수많은 사진,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어요.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코로나의 ..

Ep 03. 진짜 MBTI 'P'의 여행이란 이런 겁니다.

어느 새 부터 지겹도록 나오는 이야기 MBTI 저는 'ENTP' 입니다. 각 성향이 거의 90프로씩 나옵니다. 아주 극 ENTP ​ 개인적으로 MBTI 이야기가 이제는 정말 지겹고 큰 관심은 없지만, 이게 유행하면서 생겨난 장점은 타인을 이해하는데 꽤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. 특히 저 같이 남에게 전혀 관심 없는 스타일은 MBTI를 통해 여러 성향의 이야기를 유행 때문에 강제적으로라도 접하면서 타인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습니다. ​ 아무튼, 저는 극 ENTP의 정말 '즉흥적인' 사람입니다. ​ '내가 살면서 즉흥적으로 결정한 게 뭐였지? '생각하면 너무나도 많지만 그중에 갑자기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기로 하루 만에 결정한 일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. 21살 휴학하고 유학원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하던 중,..

Ep 01. 당신의 평생 취미는 무엇인가요? - 스쿠버다이빙

2023년 04월 태국- 시밀란 국립공원 나예림 다이빙 로그 - 로그 수 : 로그북 기록으로 107강 - 단체 : NAUI, master scuba diver - 가 본 포인트 지역 : 필리핀(아닐라오, 보라카이), 태국 (피피섬, 시밀란 국립공원), 호주 (케언즈 그레이트베리어리프 리브어보드), 멕시코 (여러 세노떼, 플라야 델 카르멘), 콜롬비아 (이슬라 데 로사리오), 한국 (강원도 사천, 거문도, 지심도, 제주도) 등등 2014년, 20살 대학교 동아리에서 시작한 '스쿠버다이빙' (다이빙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지금 꽤 많은 돈이 있었겠지만...) 이 취미는 내가 평생 함께 할 취미로 자리잡았다. 원래 바닷가 지역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부터 바다를 자주 접하고 좋아했는데, 갯벌이 주를 이루는 서해안에..